스티븐 핑커의 주요 저작 네 권이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 참 반갑다. 네 권(빈서판,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본능, 단어와 규칙)을 모두 구입하여 천천히 읽어나가기로 했다. 각 권당 거의 천페이지에 육박하는 책들이라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언젠가 다 읽어야지'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제일 먼저 읽은 책은 언어본능이다. 노엄 촘스키의 이론(인간의 생득적인 언어능력)을 대학에서 배웠을 때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고 반감까지 가졌었다.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맑스주의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에 인간이 어떤 능력을 타고난 다는 것에 상당히 거부감이 있었다.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놓여진 환경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스키너의 상자 속에 들어있는 쥐와 새처럼...
스티븐 핑커는 촘스키와 어떤 부분에서 불일치를 보이긴 하지만 언어본능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언어능력이 연어의
회귀본능이나 철새의 이동이나 비버의 댐건설처럼 타고난 본능이라는 것을 찬찬히 논증한다.
언어본능에 이어 손에 잡은 책이 바로 '빈 서판'이다. 저자의 주장과 반대되는 진영의 키워드인 '빈 서판'을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그만큼 빈서판 이론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한 때문이 아닐까? 이 반어적 제목의 책은 초반에 미리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 '본성과 양육(환경)' 중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 요소가 아니라 그 두 가지 모두라고...
그 중 우리의 고정관념(나 역시 학생 때 지배받았던)과 달리 양육이나 환경적 요인보다 본성과 유전자가 미치는 힘이
사실은 대단히 크다고...
저자가 말한 고정관념은 세 가지이다. '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 '빈 서판'은 우리는 백지상태의 마음으로
태어나 놓여진 환경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는 이론이다. 스키너와 같은 행동주의 심리학자, 좌파 이론가, 페미니즘 진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신념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는 어떤 아기라도 그에 대한 환경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그 아기를 무엇
으로든(과학자, 정치가, 연예인, 심지어 도둑)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좌파 이론가의 경우 사회적 불평등이 개인의 능력차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회적 시스템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위해, 페미니스트의 경우 남,녀의 차이가 선천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위해
'빈 서판' 이론을 선호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쌍둥이 관찰 등의 결과를 통해 '빈 서판'이 허구임을 적나라하게 밝혀준다. 태어나자마자
헤어져 자라게 된 일란성 쌍둥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 즉, 유전자가 100% 같지만 자라온 환경이 매우 다른 상황일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를 보면 유전자의 힘에 새삼 전율을 느낀다. 두 형제가 같은 직업(소방관), 같은 스타일의 외모(콧수염 등),
같은 버릇(엘리베이터에서 방귀 뀌고 모른 척 하기 등)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유전자 결정론이 혹시 옳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저자는 유전자와 타고난 본성이 100% 인간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말미에서 밝히기론 50%를 결정한다고 하고
환경이 나머지 50%을 담당하되 그 환경은 일반적인 양육환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모든 형제들이 공유하는 환경(일반
적인 양육환경)이 아니라 단독환경(개인에게만 미치는 특별한 영향)이 중요하다고 한다.
※ 단독환경이라는 것을 특별교육, 영재교육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이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재 우리나라에 만연해 있는 엄청난 교육시장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쏟는 정성의 상당부분은 그냥 자기만족일 뿐이며 아이의 성격형성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핑커의 이론을 거부하는 사람도 상당할 것이다. 책에서는 핑커의 이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로 진보진영의 사람들이라고
나오지만 현실적으로는 교육시장의 달콤한 열매를 따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위험한 이론일 테니까...
정리하자. 인간의 성격은 생애 초기에 형성되며 유전자와 타고난 본성에 상당히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이나
환경에 의해 결코 바뀌지 않는다.
핑커가 말한 다른 두 가지 고정관념 역시 신화에 불과하다. '고상한 야만인'은 원시 상태의 인류가 현재의 인류와 달리 폭력적
이지 않고 평화적이며 이타적이라는 관념이다. 그러나 인류학 보고서에 따르면 이 역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어떻게
폭력적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사회를 영위하면서
사는가?'라는 물음이 옳다. '기계 속의 유령'은 심신이원론을 뜻한다. '육체'라는 빈 껍데기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인간. 이
역시 과학적으로 허구의 관념이며 '영혼'(의식, 정신이라 해도 좋다)은 뇌라는 육체의 활동으로 생긴 산출물일 뿐이다. 즉,
이원론은 틀리고 일원론이 맞다.
핑커의 이론은 자칫 위험해 보인다. 타고난 능력이 다르다면 차별도 정당화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단호히
선을 긋는다. 남자와 여자가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여자를 차별해도 된다는 논리를 바로 도출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범죄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죄를 짓지 않았는데 처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본성에 관한 사실은 과학적 사실이고
우리가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회적 제도로 실현시켜야 할 기본 가치일 뿐이다.
핑커의 주장 중 한 가지는 아직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 핑커는 교도소의 교화프로그램과 같은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곳에
세금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한다. 범죄의 성향이 절대 교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도 교도소는 더이상 '교도소'가
아니라 '범죄인 양성소'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범죄성향이 교화되지 않는다고 하여 모든 범죄에 대해 무기한 격리를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부분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무엇일까라는 점은 아직도 고민해야 할 문제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P.S. 흥미로웠던 부분은 '정치'와 관련된 것이었다. 여타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성향 역시 타고난 측면이 있다고 한다.
물론 '타고난 신자유주의자', '타고난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건 아니다. 뱃속에서 자본론을 읽은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아닐
테니... 우리 사회엔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면서 집안에서 가부장적인 사람이 있다. 즉, 정치적 좌파가 여성주의적으로는
우파인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정치 성향이라는 것은 특정한 정치 사조를 타고났다는 말이 아니다. 책에서는 비관주의적
성향과 유토피아적 성향으로 분류한다.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적 견해(세상은 원래 이래. 어쩔 수 없어)를 가진 사람이 보수적일
확률이 높고, 유토피아적 견해(세상은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어)를 가진 사람이 진보적일 확률이 높다. 이런 식으로 보면
골수 주사파였던 사람이 뉴라이트에서 맹활약하는 것도 본성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본성이 발현되는 방식이 바뀐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즉, 김문수나 강철서신 김영환은 원래 그런 사람인 것이다. 나는? 비관주의적인 견해를 가진다. 보수적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