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이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이다.”

이 영화는 세상에 관한 영화다. 전에 박민규의 '핑퐁'을 읽었을 때 인상적이었던 구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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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 박스 안의 구조는 간단해.
1. 반응도구(지렛대, 열쇠, 원판)
2. 강화매개물(먹이, 물)
3. 자극요인(빛 큰 소리, 작은 전기충격)
4. 실험유기체(쥐, 비둘기)

그건 마치... 세계(世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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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자극과 반응으로 실험유기체를 길들이려는 거대한 스키너 박스임을 간파한 글이다.
'돼지의 왕'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험유기체이자 피지배계급인 돼지들과 실험을 주관하는
지배계급인 개-개주인도 지배계급이겠지만-로 이루어졌음을 추가로 알려준다.

이 영화의 잔혹함은 세상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서 온다. 돼지의 왕인 김철도 돼지일 뿐이며, 다른 방식으로 살 길을
모색했던 전학생 찬영이도 처세를 잘하는 것일 뿐 결국은 돼지이다.

결국 돼지들의 선택은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며 개들을 위해 열심히 제 살을 찌우는 유순한
돼지가 될 것인지, 개들과 나는 엄연히 다른 세상에서 사는 존재이므로 처신을 잘 하고 목숨을
연명해 가는 돼지가 될 것인지, 스스로 악이 되고 괴물이 되어 개들에게 약간의 상처와 아픔을
주고자 하는 돼지가 될 것인지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해도 돼지는 돼지일 뿐...

결국 이러한 절망은 돼지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때로는 타협하도록, 때로는 분노하도록,
때로는 자포자기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돼지가 돼지를 함정에 몰아넣고(경민), 돼지가 돼지를
죽이는(종석)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서도 충격이 가시질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과연 어떠한 돼지가 되었는가라는
의문 때문이다.

by cinemaletter | 2011/12/27 11:54 | 트랙백 | 덧글(0)

이분법을 넘어서
















예전에 장회익 선생님의 공부도둑을 읽은 적이 있었고 그 분의 특강도 한 차례 들은 적이 있어
그 분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꽤 많았다.

상대성 이론에 대한 이해의 틀(아인슈타인의 방식이 아니라 시공간 4차원의 틀로 이해해야 한다는
민코프스키의 방식이 보다 상대성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의 한계 및 새로운 해석 방식, 온생명 사상의 탄생 배경(생태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사유를 밀고 나간 끝에 탄생했다는 배경) 등이다.

최종덕 선생님는 잘 모르는 분이었는데 철학을 공부하기 전에 물리학을 먼저 공부하였다는 점에서
관심이 갔다. 소위 통섭이나 학제간 연구를 위한 기본적 바탕이 튼실하실 것 같다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옛날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이나 수학자를 겸하였다는 건 철학이나 자연과학, 수학이 모두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분과학문 시대에 자연과학자는 자신의
연구성과가 갖는 사회적 함의를 모르거나, 성과를 위해 윤리적 태도를 쉽게 버리는 행태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인문학자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이해 없이 과학적 용어를 그대로 일상어로 받아들여 엉뚱한 논지를
전개하기도 한다. 전자의 자연과학자의 대표적인 예는 황우석씨가 될 것 같다. 후자는 대표적인 것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세계의 우연성'을 강조하는 인문학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전에 읽었던 '대담'이란 책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와 자연과학자 최재천
교수의 대담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상호간의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는 건설적인
대담이었다.

이 책에서도 물론 그런 걸 기대했었지만, 결론적으로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대담 내용이 좀 겉도는 느낌
이랄까? 서로 상대방 주장의 핵심을 잘못 파악하거나 갑자기 다른 쪽으로 이야기의 방향이 급전환되기도
하고, 어떤 분야에선 한 쪽의 이야기만 나올 뿐 다른 쪽은 맞장구만 쳐주는 경우도 있었다.

두 분이 각각 도달한 학문의 깊이는 상당한 듯하나 대담을 하며 진행된 방식의 문제였는지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책이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이라면 과학적 용어들에 대한 중간 설명이 너무 부실한 것 같다는 점이다.
두 분이야 이미 서로가 알고 있는 용어라서 꺼리낌 없이 쓰셨을 테고 그것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용어나 배경설명이 나오는데 책의 분량이 좀 늘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충실히 설명을 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by cinemaletter | 2011/09/08 15:03 | 책과 저자 | 트랙백 | 덧글(0)

빈 서판
















스티븐 핑커의 주요 저작 네 권이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 참 반갑다. 네 권(빈서판,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본능, 단어와 규칙)을 모두 구입하여 천천히 읽어나가기로 했다. 각 권당 거의 천페이지에 육박하는 책들이라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언젠가 다 읽어야지'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제일 먼저 읽은 책은 언어본능이다. 노엄 촘스키의 이론(인간의 생득적인 언어능력)을 대학에서 배웠을 때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고 반감까지 가졌었다.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맑스주의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에 인간이 어떤 능력을 타고난 다는 것에 상당히 거부감이 있었다.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놓여진 환경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스키너의 상자 속에 들어있는 쥐와 새처럼...
스티븐 핑커는 촘스키와 어떤 부분에서 불일치를 보이긴 하지만 언어본능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언어능력이 연어의
회귀본능이나 철새의 이동이나 비버의 댐건설처럼 타고난 본능이라는 것을 찬찬히 논증한다.

언어본능에 이어 손에 잡은 책이 바로 '빈 서판'이다. 저자의 주장과 반대되는 진영의 키워드인 '빈 서판'을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그만큼 빈서판 이론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한 때문이 아닐까? 이 반어적 제목의 책은 초반에 미리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 '본성과 양육(환경)' 중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 요소가 아니라 그 두 가지 모두라고...
그 중 우리의 고정관념(나 역시 학생 때 지배받았던)과 달리 양육이나 환경적 요인보다 본성과 유전자가 미치는 힘이
사실은 대단히 크다고...

저자가 말한 고정관념은 세 가지이다. '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 '빈 서판'은 우리는 백지상태의 마음으로
태어나 놓여진 환경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는 이론이다. 스키너와 같은 행동주의 심리학자, 좌파 이론가, 페미니즘 진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신념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는 어떤 아기라도 그에 대한 환경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그 아기를 무엇
으로든(과학자, 정치가, 연예인, 심지어 도둑)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좌파 이론가의 경우 사회적 불평등이 개인의 능력차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회적 시스템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위해, 페미니스트의 경우 남,녀의 차이가 선천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위해
'빈 서판' 이론을 선호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쌍둥이 관찰 등의 결과를 통해 '빈 서판'이 허구임을 적나라하게 밝혀준다. 태어나자마자
헤어져 자라게 된 일란성 쌍둥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 즉, 유전자가 100% 같지만 자라온 환경이 매우 다른 상황일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를 보면 유전자의 힘에 새삼 전율을 느낀다. 두 형제가 같은 직업(소방관), 같은 스타일의 외모(콧수염 등),
같은 버릇(엘리베이터에서 방귀 뀌고 모른 척 하기 등)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유전자 결정론이 혹시 옳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저자는 유전자와 타고난 본성이 100% 인간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말미에서 밝히기론 50%를 결정한다고 하고
환경이 나머지 50%을 담당하되 그 환경은 일반적인 양육환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모든 형제들이 공유하는 환경(일반
적인 양육환경)이 아니라 단독환경(개인에게만 미치는 특별한 영향)이 중요하다고 한다.
 ※ 단독환경이라는 것을 특별교육, 영재교육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이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재 우리나라에 만연해 있는 엄청난 교육시장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쏟는 정성의 상당부분은 그냥 자기만족일 뿐이며 아이의 성격형성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핑커의 이론을 거부하는 사람도 상당할 것이다. 책에서는 핑커의 이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로 진보진영의 사람들이라고
나오지만 현실적으로는 교육시장의 달콤한 열매를 따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위험한 이론일 테니까...

정리하자. 인간의 성격은 생애 초기에 형성되며 유전자와 타고난 본성에 상당히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이나
환경에 의해 결코 바뀌지 않는다.

핑커가 말한 다른 두 가지 고정관념 역시 신화에 불과하다. '고상한 야만인'은 원시 상태의 인류가 현재의 인류와 달리 폭력적
이지 않고 평화적이며 이타적이라는 관념이다. 그러나 인류학 보고서에 따르면 이 역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어떻게
폭력적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사회를 영위하면서
사는가?'라는 물음이 옳다. '기계 속의 유령'은 심신이원론을 뜻한다. '육체'라는 빈 껍데기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인간. 이
역시 과학적으로 허구의 관념이며 '영혼'(의식, 정신이라 해도 좋다)은 뇌라는 육체의 활동으로 생긴 산출물일 뿐이다. 즉,
이원론은 틀리고 일원론이 맞다.

핑커의 이론은 자칫 위험해 보인다. 타고난 능력이 다르다면 차별도 정당화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단호히
선을 긋는다. 남자와 여자가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여자를 차별해도 된다는 논리를 바로 도출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범죄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죄를 짓지 않았는데 처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본성에 관한 사실은 과학적 사실이고
우리가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회적 제도로 실현시켜야 할 기본 가치일 뿐이다.

핑커의 주장 중 한 가지는 아직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 핑커는 교도소의 교화프로그램과 같은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곳에
세금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한다. 범죄의 성향이 절대 교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도 교도소는 더이상 '교도소'가
아니라 '범죄인 양성소'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범죄성향이 교화되지 않는다고 하여 모든 범죄에 대해 무기한 격리를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부분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무엇일까라는 점은 아직도 고민해야 할 문제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P.S. 흥미로웠던 부분은 '정치'와 관련된 것이었다. 여타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성향 역시 타고난 측면이 있다고 한다.
물론 '타고난 신자유주의자', '타고난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건 아니다. 뱃속에서 자본론을 읽은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아닐
테니... 우리 사회엔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면서 집안에서 가부장적인 사람이 있다. 즉, 정치적 좌파가 여성주의적으로는
우파인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정치 성향이라는 것은 특정한 정치 사조를 타고났다는 말이 아니다. 책에서는 비관주의적
성향과 유토피아적 성향으로 분류한다.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적 견해(세상은 원래 이래. 어쩔 수 없어)를 가진 사람이 보수적일
확률이 높고, 유토피아적 견해(세상은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어)를 가진 사람이 진보적일 확률이 높다. 이런 식으로 보면
골수 주사파였던 사람이 뉴라이트에서 맹활약하는 것도 본성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본성이 발현되는 방식이 바뀐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즉, 김문수나 강철서신 김영환은 원래 그런 사람인 것이다. 나는? 비관주의적인 견해를 가진다. 보수적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by cinemaletter | 2011/09/08 11:36 | 책과 저자 | 트랙백 | 덧글(0)

양심적 병역 거부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처벌이 2004년에 이어 다시 한번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판결을 받았다.
국방에 대한 위험이 우리보다 더 큰 대만에서도 허용되는 대체복무제가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언론에 소개된 국방부의 반대 논리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가 허용될 경우 '가짜 양심'을
빌미로 군 기피 현상이 만연하여 국방력 약화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사실, 현재의 헌법을 가지고 헌법재판관들이 마음만 먹으면 대체복무제 불허를 기본권 침해로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인정하도록 판결할 수 있다. 물론 2004년과 이번처럼 그 반대의 판결도 가능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럴 듯한 논리야 갖다 붙이면 되니까. 위헌으로 마음 먹으면 위헌의 논리를, 합헌으로 마음 먹으면
합헌의 논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헌재의 이번 합헌 판결은 위에 언급한 국방부의 우려를 헌재 재판관들 대부분도 인정한다는
뜻일 게다. 또한 국방부는 다시 한번 만천하에 군대가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 곳,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좋은 곳이라는 걸 선언하였다. 그들이 툭하면 내뱉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건 헛소리라는 걸 실토한
셈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없는가?

전체 인구수는 변하는데 왜 병력수는 이승만 때나 지금이나 60만명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병무청에서 입대자와
제대자를 적절히 조절하여 60만명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60만명일까?

지금은 맛이 많이 가셨지만 지만원씨는 우리나라 병력이 20만이 적당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병력을 20만으로
유지하되 강군으로 육성하고 60만명을 유지할 비용으로 신형 무기를 도입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국방력 강화
라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되기 힘들다. 국방부는 곧 죽어도 60만명을 주장할 것이다. 이유는? 그래야 장교들 승진 자리가
생기니까... 계급 피라미드에서 맨 아래층이 1/3로 확 줄면 어떻게 되겠는가? 장군<영관장교<위관장교<하사관
순으로 자리들이 없어지는 것이다. 즉, 승진하기 어렵단 얘기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군의 반발이 조~~금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병력수는 줄이되 강력한 군대로
재편해야 대체복무제의 도입이 원활해 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 때가 되면 헌재 재판관들도 위헌의 논리를 기꺼이
만들어 줄 것이다.

by cinemaletter | 2011/08/31 17:25 | 내 생각 | 트랙백 | 덧글(0)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나는 1968년 찰턴 헤스턴 주연의 원작과 팀버튼의 리메이크작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다섯 편의
후속작이 나온 영화였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프리퀄이다. 원작 영화보다 이른 시기로 올라가 그 영화의 주된 배경이나 상황이 어떻게 발생되었
는가를 추적해 들어가는 재미가 있다. 기억에 남는 프리퀄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1~3(졸지에 원래의 스타워즈 1편을
4편으로 만들어 버린), 무간도2(꽤 괜찮았다), 애니 매트릭스(인간이 왜 매트릭스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알려줌)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혹성탈출-진화의 시작'은 단순한 프리퀄을 뛰어 넘는다. 시리즈 6편까지 만들어지며 어느 정도 밝혀졌던 유인원의
지구 지배의 배경과는 다른 배경을 제시하며 하나의 독창적 작품으로서의 위상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시리즈에선
미래에서 온 똑똑한 유인원(이름은 이 영화와 같은 '시저'다)으로 말미암아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 영화에선 인간의 실험으로 탄생한 똑똑한 유인원이 진화의 시작이 되었다. 원래 시리즈의 인간이 단순한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지배자의 신세였다면 이 영화에선 인간 몰락의 원인을 바로 인간이 제공한 셈이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이 인간을
바이러스로 묘사할 때처럼, 이 영화도 우리 자신을 성찰하도록 만든다.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은 영화 후반부 인간과 유인원의 대결 장면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시저와
동료 유인원의 시점을 가지고 그들이 인간(우리와 동종)을 물리칠 때 오히려 희열을 느낀다. 이런 놀라운 체험을 제공한
영화는 한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훗날 SF계의 고전이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사실, 타 종의 동물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설정은 원작 혹성탈출 이전에도 있었다. 내가 아는 범위내에선 조너던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의 제4부 '말들의 나라'가 처음인 듯하다. 보통 걸리버여행기는 1부 소인국, 2부 대인국의 얘기로 구성된 아이들
동화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3부 '천공의 섬 라퓨타', 4부 '말들의 나라'까지 있으며 문명비판적인 풍자를 담은 소설이다.
'말들의 나라'에서 말은 '휴이넘(말 울음소리에서 따옴)', 인간은 '야후(검색포털 Yahoo의 기원이 됨)'로 불리우며 휴이넘은
신사적이고 인품이 훌륭한 인격체로 묘사된 반면 야후는 야만적으로 묘사된다. 걸리버는 귀환 후에도 인간들을 무서워 하고
마굿간에서 말들과 지내려고 하는 정신적 후유증을 겪는다.

혹성탈출이나 걸리버여행기의 주제는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도구적 이성이 아닌 반성적 이성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P.S. 시저를 창조한 앤디 서키스의 연기는 가면 갈수록 대단하다. 골룸과 킹콩에 이어 훨씬 대단한 캐릭터를 창조했다.
물론 CG의 발달도 큰 역할을 했을 테지만 우리가 인간이 아닌 유인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은 시저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변화를 묘사해 낸 얼굴 표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인원 보호소에서 벽에 그린 유리창을 지우고 남자주인공을
따라 집에 가지 않고 다시 철창문을 닫는 장면은 그 어떤 인간의 연기보다 훌륭했다. 아울러 유인원 무리를 이끌고 인간과
대적하는 장면에서 시저의 카리스마는 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by cinemaletter | 2011/08/31 08:44 | 영화,공연 | 트랙백 | 덧글(0)

무상급식 단상

어제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가 투표율 33.3%에 미달되어 투표 자체가 무효가 되었다.
나는 무상급식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기분 좋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오세훈 시장이
시장직을 걸고 투표를 호소함으로써 그가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 역시 잘된 일이다.

그런데 이번 투표를 둘러싸고 찬반론자들이 서로 내세운 슬로건은 보기가 매우 불편했다.
양쪽 슬로건 모두. 물론 구호라는 것이 짧고 간결하게 작성되는 것이고 그 안에 숨어있는
논리를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나 사실관계 자체를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무상급식을 지지하는 입장이라 반대논리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반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무상급식을 복지포퓰리즘이라 폄하하며 반대하는 논리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1. 급식비를 낼 능력이 있는 가정에까지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은 과잉복지이고 예산낭비이며,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2. 과잉복지로 인해 결국은 시민들이 내는 세금이 더 많아질 것이다. 즉, 공짜가 아니다.

 3. 복지는 결국 시민들의 의존성을 심화시킨다. 복지보다는 자립적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투자, 일자리 창출 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4. 각종 토목사업을 벌일 예산의 일부만 있어도 충분히 무상급식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지만,
     무상급식 예산과 여타 사업예산을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무상급식은 복지비용으로
     순수한 지출의 성격을 가지나 토목사업은 투자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자리창출에
     기여함은 물론 향후 관광수익 등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정도의 논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반박논리는 이렇다.

1. 이 생각은 사실 '수익자 부담 원칙'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다. 즉, 밥을 먹는 수익자가 밥값을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며, 다만 밥값을 부담하기 어려운 사람들에 한해서만 국가가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공공재 및 공공사업에서 '수익자 부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보기 드물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 예를 들어 우리는 원가에 훨씬 못 미치는 가격으로 지하철, 버스, 철도를 이용한다. 정말 수익자가
   서비스에 대한 댓가를 제대로 지불하려면 지하철 기본요금은 약 2천원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요금체계 하에서 지하철 공사는 적자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그 적자는 결국
   모든 시민이 공동으로 부담하게 된다.
- '나는 지하철 타지도 않는데 내가 왜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이 타는 지하철 요금을 부담해야 하는가?'
   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 대중교통은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익자 부담 원칙'보다는 사회적 비용으로 보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렇게 할 때 부의 재분배 효과를 가져와 경제적 평등이 일부 실현될 수
   있다는 합의가 현재의 요금체계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 교육 역시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무상 의무교육은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이다. 다만,
   무상의 범위를 어느 정도까지 규정할 것이냐(수업료만 무상인가. 수업료를 포함한 급식비, 교재
   및 교보재도 무상인가)는 그 사회의 발달 정도에 따라 탄력적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할 문제이다.
- 내 생각에 현 우리나라의 발달 수준으로 봤을 때 급식비를 무상교육의 범위내로 포함시켜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예산으로 지원해 주는 것은 적당하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나는 무상급식을 지지한다.

2. 이것은 행정기관이 예산을 운용하기 나름이다. 다른 재정지출을 줄이고 그 돈으로 교육예산을 늘려주느냐,
    세금을 더 걷어서 충당하느냐는 정책적 결정 사안이며 반드시 무상급식이 세금폭탄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맞지 않는 논리다.
- 단, 세금을 더 걷더라도 부유한 계층의 세금이 더 늘어난다면 사회전체적으로 경제적 평등이 일부 실현되는
   효과가 있으므로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것이다. 부자집 아이에게 공짜로 밥을 주는 것을 (진심으로) 부당하다
   생각하는 정의로우신 분들이 부자에게 세금을 더 물리는 것을 비난한다면 정신분열증이 의심된다 할 것이다.

3. 옳은 얘기다. 나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이기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가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는 사회에서는
    무임승차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복지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충분히 경계해야 하고 귀 기울여야
    하는 의견이라 생각한다.
- 단, 현재의 우리나라 수준과 같이 경제적 소외 계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없다시피한 복지후진국에서
   유럽에서도 최고수준의 복지정책이 불러올 부작용을 우려한다는 것은 그 걱정이 진심이 아님을 말해 줄 뿐이다.

4. 이것 역시 옳은 얘기다. 무상급식 지지자들이 교육예산과 전혀 상관없는 사업예산(새빛둥둥섬, 아라뱃길 등)을
    거론하면서 '이런 거 안 하면 애들 밥 얼마든지 공짜로 먹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걸 많이 봤는데 치졸하면서도
    논리적이지 못한 대응이다.
- 어떤 사업의 타당성 여부는 그 나름대로 분석해서 그것이 적합한 사업인지 아닌지를 가려야 할 뿐, 그 사업이
   타당하지 못한 사업이라고 해서 '무상급식 사업'의 타당성이 자동적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그런 사업에 엄청난 돈을 쓰면서 쪼잔하게 애들 밥 먹는 거 가지고 왜 그러느냐'는 주장은 부당 결부
   금지의 원칙을 어기는 논리다.
- 이 글에서 서울시의 많은 토목사업들의 타당성을 논할 생각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다. 다만, 이 점만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데, 복지예산이 비록 한번 책정되면 증액만 가능할 뿐 감액하기 어려운 경직성 예산이긴 하지만
   복지에 사용되는 돈이 쓰면 없어져 버리는 단순 지출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지분야의 재정지출도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특히 교육은 우리나라와 같은 경제구조에서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정말 중요한 '투자'
   행위이다.

by cinemaletter | 2011/08/25 13:22 | 내 생각 | 트랙백 | 덧글(0)

왓치맨


너무나도 유명한-특히 촛불집회에서의 가이 포크스 가면 플래쉬 몹이나 얼마 전 영국에서의 MB OUT 퍼포먼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브이 포 벤데타의 작가 앨런 무어의 작품으로서 그래픽 노블의 전설이라 불리우는 왓치맨을 읽었다.

아마도 영화 왓치맨이 더 유명하겠지만 익히 알려진 사실과 같이 앨런 무어는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것을 극구 반대
할 뿐 아니라 영화화된 작품에 대해서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작품은 영화화될 수
없다라는 선언적 발언 때문인 것 같은데, 영화화가 치밀한 이야기 구조를 해치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거운
주제 의식이 가볍게 다뤄지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실제 브이 포 벤데타의 경우 책에서는 브이의 내면, 그가 가면을 쓰고 활약하게 된 동기, 민주주의와 혁명에 대한 통찰
같은 것이 심도있게 그려져 있었으나 영화에서는 분량의 한계와 시각적 볼거리에 대한 매몰 때문에 주제의식이 약화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왓치맨의 경우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두 장르를 비교해 볼 순 없다. 영화 <300>의 감독이었던 잭 스나이더가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으며 밝혔듯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했다면 믿고 한번 영화를 볼 생각이다.

앨런 무어가 생각하는 수퍼 히어로는 과연 무엇일까? 이 작품은 DC와 마블의 수퍼 히어로물에 대한 단순한 비틀기를
시도한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기괴한(?) 수퍼 히어로들은 곧 파괴된 인간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그들의 활약과 이상은 정의라는 가치와 삶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 그 자체로 보인다.

특히 작품 속의 작품인 '검은 수송선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는 자신의 머릿 속에서 구성된 정의의 환상이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시키고 급기야 아무 죄없는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결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치 세상의 정의를 위해 일어선 수퍼
히어로가 역설적으로 수백만명을 죽여 세상의 평화를 찾아온다는 작품 전체의 결말을 미리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비판 의식은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우파로 그려진 로어셰크(우익 잡지 뉴 프론티어즈맨의
열혈 구독자)는 마스크를 쓴 히어로들을 죽이는 '마스크 킬러'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그는 경찰과 법을 믿지 않으며 악에 대한 직접적 행동과 처단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미국의 총기소지 옹호자들의
논리를 대변하는 듯 하다. 반면 작품 속에서 좌파로 그려진 오지맨디아스(좌익 잡지 노바 익스프레스를 후원하며 모든
사건의 배후조종자)는 뉴욕시민 수백만명을 희생시켜 세계 제3차대전을 막아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혁명에 따른 불가피한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혁명가들의 논리를 대변하는 듯 하다.

주제의식이 명확했던 브이 포 벤데타와는 달리 조금은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가 내린 왓치맨의 주제의식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모두가 생각하는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어느 누구도 나의 정의를 실현
시키기 위해 함부로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이 책의 출판사가 전두환 아들래미의 회사라는 사실은 또 하나의 역설이었다.

by cinemaletter | 2009/09/01 13:33 | 책과 저자 | 트랙백 | 덧글(0)

마르틴 니묄러-그들이 처음 왔을 때

신문 칼럼에선가 읽었는데 좋은 글이라 생각해서 올린다.
(아마도 최재천 전 전의원이 기고한 글이라 추측된다)

-------------------------------------------------------------

나치는 우선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사민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 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by cinemaletter | 2009/03/31 13:38 | 트랙백 | 덧글(0)

그랜 토리노





















일단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라면 안심하고 관람해도 무방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의 내공은 이번 영화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전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연상됐다. 거기서 퇴물 복싱 트레이너였던 프랭키와 이 영화의 한국전
참전용사이자 보수적 미국가치를 신봉하는 월트 코왈스키는 그의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외부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서서히, 그리고 아주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면서... 두 영화에서 진짜 가족은 오히려 가족이라 하기 민망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의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가족과 이 영화에서의 월트의 가족 말이다. 항상 무언가를 바라기만 할 뿐 따뜻한
가족애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에 반해 월트에게는 철저한 외부인에 불과했던 동양인 이웃들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더 잘 헤아려 주고 아내를 잃은 그에게 끊임없이 음식을 제공하며 가까워 지려고 노력한다. 물론 월트가 본의 아니게 옆 집의
타오를 갱으로부터 구해주기 전에는 동양인 이웃들도 그를 외부인 취급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동양인 할머니가 자신의
모어로 '왜 아직도 이사 안 갔는지 몰라'라고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마을은 동양인 거주구역이었던 것 같다)

완고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던 고집센 노인이 외부인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을 가족처럼 대하며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 이 양반은 두 영화에서 변화의 희망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결코 가볍지 않은 메세지를 재미있게 그려나가는 것은
가히 천재적 재능이라 할 만하다. 그것이 그의 재능인지 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스크린에서 그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by cinemaletter | 2009/03/26 19:53 | 영화,공연 | 트랙백 | 덧글(1)

블로그 전문 “이글루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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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maletter | 2009/02/19 15:39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집회, 시위 현장에서는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이전부터 많은 카메라들이 돌아갔다. 물론 작년 이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만큼은 아니지만 80~90년대의 집회, 시위 관련 영상자료들도 꽤 많이 볼 수 있다.

시위를 하는 쪽과 그것을 막고 진압하는 경찰쪽은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자료가 아닌
상대의 폭력이 부각되는 영상만을 공개하곤 한다. 시위대 자료를 보면 경찰의 과잉진압이 부각되어 있고, 경찰
자료를 보면 시위대의 폭력성이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것이 진실일까? 물론 둘 다 진실이기도
하고, 둘 다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만약 두 개를 모두 본다해도 완전한 진실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진실이냐
진실이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양쪽의 시각을 모두 체험해 봄으로써 사건에 대한 개별적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두 영화(이면서 한 영화이기도 하다)가 각각 미국의 시각과 일본의 시각을 다루었다는 말은
맞지 않다. 개별 미국인들과 개별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 나름대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보다 옳은 설명일 것이다. 그 전투에 참가해 서로를 죽였던 양 쪽 군인들 모두
한 집안의 사랑스러운 아들이고 듬직한 남편이고 자상한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영화(들)의 존재의 의의는
드러난다.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고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드는가를 말해주는 영화는 그런대로 꽤 있다. 하지만 한 미국
인이 한 일본인을 죽였는데 그 일본인은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전쟁에 참가한, 사실은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를 죽인 미국인은 이러이러한 배경을 지닌, 역시나 훌륭한 청년이었다는 점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는
다르다. 개별성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어떤 반전메세지보다 더 전쟁을 반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될 수 있다.

P.S.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국민정서에 맞지 않아, 또는 그로 인한 흥행수입 저조 예상으로 국내에서 개봉을 하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과 동시에 부끄러운 일이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던 '요코이야기'가 제국주의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호하게 할 수 있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 개인적 체험으로서 진실을 담고 있지만
한국에선 그것을 모두 날조라고 여겼다. 일본인이 피해자인 것처럼 그려지는 모든 이야기들을 참아낼 수 없는 유아기적
정서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리 좋을 것이 없다.

by cinemaletter | 2009/01/28 13:11 | 영화,공연 | 덧글(0)

신기하다~

위장탈북 30대 女간첩 검거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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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전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현 공안정국을 비아냥거리는 댓글 하나를 보았다.
"이러다 좀 있으면 간첩도 하나 잡히겠다"
아니나 다를까 간첩이 잡혔다. 이런 신기한 일이...

by cinemaletter | 2008/08/28 08:23 | News | 트랙백 | 덧글(4)

쿵푸 팬더


참 잘 만든다. 단지 기술이 뛰어나서? 아니다. 이 영화가 재밌는 이유는 구현하기 힘들다는
동물의 털을 거의 실사와 같이 만들어낸 것 때문도 아니고 눈처럼 흩날리는 복숭아 꽃잎들
때문도 아니며 현란한 카메라 워크 덕분도 아니다(물론 그런 기술적인 면들은 기본적으로
아주 훌륭하다).

물론 스토리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영화 시작 5분만'이 아니라 영화
제목만을 보고도 80%이상의 전체 스토리가 그려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 내러티브가 없다
고 할 것인가?(진중권이 '디 워'를 비판할 때 썼던 표현)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의 재미는 바로 전복적 사고의 힘에서 나온다. 팬더가 쿵푸를 한다는 것 자체도
기발하지만 오리와 팬더가 서로 부자지간으로 나오고 끝내 악인을 무찌르기는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날렵한 쿵푸 고수는 되지 못하는 팬더의 모습에서 상식의 전복이라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외국 애니메이션을 볼 때 마다 느끼는 부러운 점. 어찌하여 외국 배우들은 실사 연기 뿐
아니라 목소리 연기도 그렇게 훌륭하신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바로 목소리 연기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선 한없이 부러운 것이었다.
(포를 연기한 잭 블랙과 시푸를 연기한 더스틴 호프만이 역시 최고)

by cinemaletter | 2008/07/01 17:47 | 영화,공연 | 트랙백 | 덧글(6)

완득이



출간과 동시에 전방위적 마케팅을 펼친 이 책에 대해 처음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말이다. 아무래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맨 처음 수상한 덕분에
상에 대한 권위와 관심을 위해 그런 마케팅 정책을 폈는지 모르겠다.

곱지 않았던 시선을 극복하고 이 책을 읽게 된 건 평이 괜찮아서였다. 인터넷 서평이나
주변 사람들의 평이 꽤 괜찮았고 서점에서 훑어본 느낌도 꽤 신선했다.

장애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싸움의 달인인 고등학생이,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아버지에 반발하여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담임 선생을 만나 성장해 간다는
독특한 소설이다. 하지만 가난의 궁상도, 차별받는 사람의 비참함도, 심지어 공부 잘
하는 여자친구 엄마의 부당한 절교 요구도 전혀 비장하지 않다. 쿨하다 못해 너무 무
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다만 가끔씩, 아주 가끔씩 읽는 사람을 뭉
클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바로 17년만에 만난 어머니와 관련된 일화에서 그렇다. 아이
의 젖만 떼고 집을 나갔던 베트남인 어머니가 17년만에 아들을 만나 존대말을 하는
(17년이면 한국어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질 시간 아닌가? 그 존대말은 언어의 미숙
때문이 아니라 죄책감에서 나온 것이리라!) 장면이나, 힘들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아들이 어머니에게 구두를 사주는 장면이 은근히 감동적이다.

태생이 청소년문학이라 그런 지 이 소설을 대놓고 올바르다. 장애인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청소년 문제, 입시 문제 등에서 각종 시민단체들이 주장할 만한 모범적인 답안들
로 소설을 썼나 싶을 정도이다. 성인 독자들에겐 이 적나라한 올바름이 때때로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작가의 재기발랄한 글솜씨가 그런 불편함을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by cinemaletter | 2008/06/30 13:28 | 책과 저자 | 트랙백 | 덧글(1)

내가 생각하는 미국산 쇠고기 사태 수혜자들

1. 노무현 : 명박이가 하도 죽을 쑤니 거저먹기 재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가 재평가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명박이와 함께 현 사태의 책임
을 지고 비난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 명박이가 이렇게도 불리한 조건으로 쇠고기 협상을 타결한
이유가 단지 부시와 함께 캠프 데이비드에 숙박 한번 해보고 싶어서였겠는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바로 한미FTA타결의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미FTA는 노무현이 사활을 걸
고 추진한 일이었고 쇠고기 협상은 명박이가 아니었더라도 그가 타결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명박이처럼 무개념, 무대포로 화끈하게 모든 것을 미국 입맛대로 타결하진 않았을 지라도...
2. 박근혜와 그 일당들 : 이번 사태가 없었어도 그 일당들의 한나라당 복당은 시간문제였을 수 있다.
하지만 민심을 잃은 한나라당이 다급해진 나머지 국회내에서라도 확실한 다수가 되기 위해서 명박
이만큼이나 화끈하게 박근혜의 추종자들을 받아들이게 된 점 때문에 그들 역시 이번 파동의 수혜
자이다.
3. 이건희 : 왠진 아시겠지? 신문 1면을 오랫동안 장식했어야 할 이건희와 그 졸개들의 범법행위가
단신으로 처리되고 있으니...
4. 강기갑 : 물론 사천에서 이방호를 이기며 당선됐다는 점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열악한 상황을 딛고 17대 국회에서 스타로 자리매김한 심상
정, 노회찬에 비하면 그의 성공은 급을 달리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이방호를 이긴 것도 이명박과
박근혜의 싸움에서 얻은 어부지리적 측면이 강하지 않은가?).
 
5. 공기업 낙하산 인사들 : 국민들의 시선이 쇠고기에 쏠리고 있을 무렵 명박이는 측근들에게 전리품
을 나누어 주고 있다. 과연 '쥐박이'라는 그의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약삭빠른 짓이라 할 것이다.
6. 진중권 : 집회현장에서 누군가 "진중권이닷!"하고 외치니 삽시간에 여성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
다. 드라마 <온에어>의 오승아(김하늘분) 못지 않은 인기였다.
7. 예비군 : 흐트러진 옷차림과 불량한 매너로 혐오의 대상이었던 예비군 아저씨들이 촛불을 든 시민
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멋진 예비군 오빠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 물론 보수단체 집회에서 선글래스
와 군복으로 그들의 정신적 지주 박통의 패션스타일을 흉내내고 계시는 그 예비군들은 제외다.
8. 한겨레,경향 : 조,중,동의 광고국이 시민들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이 한겨레와 경향은 구
독자가 늘었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두 신문사가 재정적으로 풍족해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9. 아프리카, 민중의 소리, 오마이뉴스 : 오마이뉴스야 알고 있었지만 아프리카, 민중의 소리는 전혀
모르는 사이트였다. 촛불집회 인터넷 생중계로 인해 엄청난 홍보효과를 얻은 그들 역시 수혜자라
할 것이다.
10. 양초회사 : 아무리 생각해도 양초산업은 사양산업인 것 같았다. 그러나 촛불집회로 인해 팔려나간
엄청난 숫자의 양초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을 지 모른다. 마치 80년대 최루탄을 만들어 떼돈
을 번 한화그룹에 버금가는 집회 수혜자일 것이다. 그런데 혹시 중국산?
11. 광화문 및 시청 일대 24시간 편의점 : 예전 집회가 주로 낮시간에 이루어졌던 반면 밤샘 집회가 많
아짐에 따라 24시간내내 문을 여는 편의점이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다만 수혜자는 편의점
사장일 뿐 알바생은 예나 지금이나 시간당 임금이 똑같아 생기는 거 없이 힘만 든다.
12. 다음 : 아직 검색시장에서 네이버의 시장지배력은 막강하지만 다음의 아고라가 각광을 받으면서
뉴스부문의 페이지뷰는 다음이 네이버를 추월하기도 했다. 조,중,동과 더불어 네이버의 몰락을
기원한다.
13. 지하철공사, 도시철도공사 : 버스회사에는 안 된 얘기지만 길이 막힐 때에도 변함없이 약속시간을
지켜주는 지하철은 이용객이 많이 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4. 호주산 청정우 : 롯데리아와 맥도널드에 붙은 안내문구. 유명한 고깃집이나 설렁탕집에 붙은 현수
막. 모두 자기들은 깨끗한 청정우인 호주산 쇠고기를 쓴단다. 돈 한 푼 안들이고 수십, 수백억의
광고효과를 얻은 호주산 쇠고기야말로 최대의 수혜자 아닐까? 다만, 한우농가가 비싼 가격으로
말미암아 이번 사태의 수혜자가 되지 못한 점은 정말 안타깝다.

by cinemaletter | 2008/06/13 15:13 | 내 생각 | 트랙백 | 덧글(3)

고래




























참 기괴한 소설이다. 이야기의 내용도 기괴하지만 형식도 기괴하다. 아니, 형식면에서 기괴하다기보다는
어딘가 고전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독자가 아닌 청중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나레이터의 말투, 수시로
등장하는 과장법(사람의 몸무게가 1톤이나 된다는 등),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과 사라짐, 그리고 재등장,
우연의 연속(주인공 '금복'의 계속되는 성공 등), '금복'을 제외하곤 평면적인 인물상 등등 시대적 배경이
20세기일 뿐 이 소설은 고전소설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듯 하다.

소설의 1부, 2부는 주로 '금복'이라는 여자의 일생을 다룬다. 두메산골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던 시골소녀가
마을에 생선을 팔러 온 생선장수를 따라 부둣가로 나가게 되고 거기서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며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다 급기야 파멸하는 이야기. 3부는 '금복'의 딸 '춘희'의 이야기이다. 물론 1부, 2부에도 등장
하지만 3부는 '춘희'의 원톱체제 스토리이다.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태어난 말 못하는 벙어리 소녀 '춘희'가
어떻게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듣게 된(물론 사후에 붙여진 것이지만)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이한 점은 이 소설이 (생물학적) 여자들의 이야기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남자들은 멍청하거나,
사랑에 눈이 멀었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사랑을 두려워 하거나, 배포가 없거나, 욕심 때문에 파멸하거나, 하여튼
속된 말로 좀 찌질하다. 그런데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소설 속 여자 인물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여성답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엄청난 배포와 두뇌회전을 자랑하는 '금복'은 급기야 죽기 얼마 전에는 아예 남자가 된다.
타고난 괴력의 소유자 '춘희'는 겉보기에도 남자나 다름없다. 결국 소설에서는 '여자답다'는 것과 '남자답다'는
것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 소설을 여성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 지도 모른다.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 소설은 과연 어떤 소설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것 또한 무의미한
짓일 지 모른다. 이 소설은 그냥 옛날 이야기를 듣는다는 생각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 올바른 독서법일 것 같다.
다만, 옛날 이야기와 다른 것은 권선징악의 교훈이 없다는 것. 바로 그 점에서 이 소설은 고전소설을 넘어선 것이다.

by cinemaletter | 2008/06/08 23:00 | 책과 저자 | 트랙백 | 덧글(0)

다섯은 너무 많아



'이게 뭐야? <가족의 탄생>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잖아?'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보았지만
알고 보니 <가족의 탄생>보다 먼저 개봉한 영화였다. 비슷한 시기에 '대안 가족'이라는 같은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아 우리 사회의 가족 개념이 많이 변화한 것 같다.
마음씨가 너무 좋아 오갈 데 없는 어려운 사람을 자신이 혼자 사는 단칸방에서 재워 주는 한
노처녀와 가출한 중학생, 월급 떼인 중국 동포, 망한 분식집 사장이 새로운 가족을 이루어
사는 이야기이다. 대장격인 노처녀는 정작 자신의 진짜 가족으로부터는 많은 상처를 받고
산다. 아마도 맏딸일 듯한 그녀는 아버지의 병원비와 동생의 학비, 그리고 어머니의 사치비를
대기 위해 도시락 판매점 종업원으로 번 돈의 상당부분을 송금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가족을
이루게 되면서 그녀의 송금행위는 중단된다. 돈이 오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는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새로운 가족들 앞에서 파렴치하게 돈을 내놓으라고 난동을 부린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에 그녀는 '엄마가 날 키웠어?'라고 반문하며 쌓였던 분노
를 폭발시킨다.
'대안가족'이 반드시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살다보면 그 안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싹틀 것이다. 하지만 기존 가족에 대한 비판의식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의무와 희생을 구성원들에게 부여하였던가? 거기엔 가해자
와 피해자가 따로 있지 않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신을 희생하며 자
식을 키웠고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꿈과 희망을 접어야 했다.
가족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이 되는 것. 그것이 '대안가족'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일 것이다. 주체적인 개인들이 이루는 가족이라면 그것이 기존의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할 지라도 '대안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by cinemaletter | 2008/06/06 22:58 | 영화,공연 | 트랙백 | 덧글(0)



누구나 알고있는 작가이면서 그 사람이 쓴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작가가 제법 있다.
그 중 한 명이 이외수씨이다. 외모에서 풍기는 아우라로 말미암아 난해한 작품을 쓸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지만 막상 읽어 본 그의 작품 <칼>은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작품
이었다. 하긴 어디선가 읽은 바로는 이외수씨의 문장을 다듬는 작업은 그야말로 절차탁마의
작업이라더니 잘 다듬은 문장은 잘 읽힐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칼>은 1982년도 작품이다. 그의 최근작도 많은데 하필 오래된 작품을 읽은 이유는 도서관
에서 대출할 수 있는 그의 책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독자들이 꾸준히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1982년도 작품답게 지금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 본의
아닌 즐거움을 준다. 예를 들면 박정달씨가 친구에게 전화를 할 땐 항상 공중전화를 이용하고
가끔 동전이 떨어져 전화가 끊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초능력자 유리겔러를 언급하며 초자연
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장면도 나온다. 지금이야 유리겔러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지만 그 당시
전세계적인 대단한 열풍이 불었었다. 약장수나 참기름 장수가 등장하는 것도 시대적 배경이
옛날인 탓이다.
그렇지만 이런 시대적 배경을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책의 내용은 흡인력이 있고 흥미롭게 진행
된다. 회사에서는 권고사직을 당하고 어렸을 때부터 폭력에 굴복하는 비굴한 삶을 살아온
박정달씨는 학생 시절 한때 폭력배에 저항해 보고자 잠시 칼을 품고 다녔었고 그로 말미암아
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칼 매니아가 된다. 칼에 대한 지식을 쌓고 전 세계의 수많은 칼을
실제 수집하는 것으로 모자라 퇴직후 그는 직접 신검을 만들고자 대장간을 차린다.
그가 신검을 만들려는 목적은 그것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것도 아니요,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요,
복수를 하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세상의 악과 부조리함을 신검의 등장이 해결해 줄 수 있으리
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점차 신검에 대한 무서운 집념을 가지게 되었고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다가 끝내 신검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신검은 불완전
한 것이었고 완전함을 얻기 위해 사람의 피(목숨)를 필요로 했다. 그는 신검을 찾으러 온 도사에
게 칼을 완성하기 위해 한 사람의 목숨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고민하다가 결국 누구의 목숨도
희생할 수 없으므로 자기 목숨을 바치고자 한다. 그런데 그런 결심을 굳혔음에도 돌아누워 자고
있는 도사를 보며 '왜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의 목숨은 안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도사를 향해
칼을 뻗었고 도사는 도리어 칼날을 피하고 순식간에 박정달씨의 목숨을 앗아간다.
흥미롭게 읽히던 소설에서 갑자기 이런 장면이 나왔을 때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박정달씨는 왜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는가? 칼의 완성을 이루려는 과욕때문에? 아니면 광기의 끝이 파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 생각엔 그는 결국 사회의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가 신검을 만들
려는 목적이 사회의 악과 부조리를 없애기 위함이었고 그 칼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난 후 그는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검을 완성하려 했다. 비록 목숨에 대한 미련이 남아 순간적
인 판단착오를 일으켜 도사를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결국 자신의 희생으로 칼을 완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해도 뒷맛은 개운치 않다. 그럼 과연 도사는 누구일까? 누군데 박정달씨가 어렵게
만든 신검과 그의 목숨까지 거두어 간 것인가? 그는 과연 신검을 가져가서 세상의 악과 부조리를
없애는 데 사용하였을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그는 박정달씨와 같은 약자의 희생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악과 부조리'에 다름 아니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서 박정달씨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로 처리되고, 그와 만나기로 했던
친구는 약속 장소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며, 그의 대장간 직원 정군은 비보를 듣고 달려왔지만
그의 시체는 말끔히 치워진 채 유품인 족자만을 거둬간다.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돌아가고
'악과 부조리'는 오늘날까지 판을 치고 있다. 악이 승리한 것이다.

by cinemaletter | 2008/06/06 22:17 | 책과 저자 | 트랙백 | 덧글(2)

무서운 이야기

오늘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이명박이 대통령된 지 이제 100일이 지났다는 것이다.
100년이 아니고 100일...
그의 임기는 2013년까지이다.

by cinemaletter | 2008/06/03 20:33 | 내 생각 | 트랙백 | 덧글(4)

라쇼몽



(스포일러가 왕창 있음)
그렇게나 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영화였는데 이제야 보았다. 예전에 <핑거포스트 1663>에 대한
글을 쓸 때에도 이 영화를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스토리 구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의 진실만이 있을 테지만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 입장을 가지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상황은 너무나 흥미롭다.
사무라이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내를 탐하는 도적 타지오마루 사이에 벌어진 일 중 모두가 동의
하는 것은 도적이 사무라이를 꾀어 내 묶어놓고 그 앞에서 그의 아내를 겁탈하였으며, 그 이후
사무라이는 죽고 아내는 사라지고 도적은 잡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각자의 진술이 모두 다르다.
타지오마루는 여자를 겁탈한 후 여자가 두 사람 중 살아남는 사람을 따르겠다고 해서 사무라이의
결박을 풀어주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낸 끝에 죽이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여자는 도적에게 겁탈
당한 후 사무라이의 혐오감 어린 시선에 이성을 잃고 그를 살해했으며 그 이후 자신도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진술했다. 무당의 몸을 빌어 진술한 사무라이는 여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도적
에게 자신을 살해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도적이 여자에게 혐오감을 느껴 여자를
죽이려 했지만 여자는 달아났고 자신은 배신감에 괴로워 하다 자살했다고 한다.
결국 세 사람의 진술은 일치하지 않아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라쇼몽 아래
비를 피하던 나뭇꾼이 결정적인 진술을 한다. 실은 그가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을 모두 지켜보
았지만 값비싼 칼을 하나 훔친 일 때문에 관아에서 사실대로 진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정말 가관이다. 도적과 사무라이 사이의 결투는 결투가 아니라 동네 양아치들의
유치한 싸움 같고 여자는 자기 목숨만 구하려 달아난다. 결국 나중에는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진술했던 것이다. 사형당하기 직전에도(도적), 이미 죽은 다음에도(사무라이)...
라쇼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영화는 '라쇼몽'과 '덤불 속에서'라는
두 소설을 합쳐서 각색한 것이다. 영화의 주를 이루는 부분은 '덤불 속에서'의 내용이고, '라쇼몽'은
영화의 제목을 되었다. 제목만 따온 것은 아니고 영화 속 이야기 진행자들(비를 피해 라쇼몽에 모인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설 '라쇼몽'에서는 버려진 시체의 머리
카락을 잘라 생계를 유지하려는 노파와 도둑이 될까 굶어 죽을까를 고민하던 하인이 나온다. 하인은
결국 노파의 변명(머리카락이 잘린 저 시체는 살아 있을 때 나쁜 사람이었으니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시체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에 깨달음(?)을 얻어 자신 역시 꺼리낌 없이
노파를 위협해서 옷을 훔쳐 달아난다. 노파가 살기 위해 자신의 나쁜 짓을 합리화하는데 자신도 그러
지 못할 것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영화 '라쇼몽'에서는 버려진 아기의 옷을 훔치려던 한 나그네
에게 나뭇꾼(원래 이야기의 목격자)이 그럴 수 있느냐는 질책을 하고 그런 나뭇꾼에게 나그네가
당신 역시 남의 물건을 훔친 것 때문에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았는데 무슨 자격으로 자신을 비난하느
냐며 되레 큰소리친다. 결국 나뭇꾼은 그 아기를 자신이 맡아 키우겠다고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두 소설을 합친만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두 가지이다. 누구나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할
뿐이며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허물은 깨닫기 힘들다는 것.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의미있는 주제이며 바로 이런 맛에 고전을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by cinemaletter | 2008/05/31 14:28 | 영화,공연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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